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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는 농삿꾼이다” 기부천사 황규열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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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나는 농삿꾼이다” 기부천사 황규열 선생과의 만남

제 버릇 개 못준다···기부는 계속 될 것이다세상에서 젤 행복할 때...(나눔)기부 했을

   
▲ “남들과 나눔했을 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 가장 서러울 때는 배고플 때다, 나는 배 고픔을 알고 몸으로 겪었다, 아마도 내게 남은 인생 ‘제 버릇 개 못준다’ 내가 농사를 짓는 한 아마도 기부는 계속 될 것이다” 라며 껄껄 웃는다.

[광교저널 경기.용인/최현숙 기자] 한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세차게 불던 지난 1월 6일 용인시 수지구청 앞에는 수많은 용인시민이 운집해 있었다. 그 가운데 村老(촌로) 기부천사로 알려진 황규열(77. 백암면) 선생이 평창 동계올림픽 용인시 성화 봉송 첫 주자로 서 있었다. 그는 성화를 들고 달리는 동안 “용인시민 사랑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달렸다.

   
▲ 지난 6일 오전 10시 40분 수지구청 앞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성화를 황규열 선생께서 용인시 첫 주자로 나서 "용인시민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봉송하고 있다.

그는 왜 “용인시민 사랑합니다”를 외치면 달렸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본 취재진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지난 1월 17일 용인시인재육성재단에서 취재진이 그를 다시 만났을 때 비로소 그가 왜 그렇게 외치며 성화 봉송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용인시인재육성재단에서 처음 만나 황규열 선생은 백발의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기고 깔끔하면서 멋스러운 복장으로 우리를 맞이해 줬다. 그의 첫인상은 어느 시골 농사만 짓고 사는 촌로(기자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지만)라는 생각보다 어느 중견기업 회장 같은 중후한 멋과 카리스마, 자기만의 철학으로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느낌이 먼저 다가왔다.

   
▲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성화 봉송 용인시 첫 번째 주자라니 꿈에도 못 꿀 일이지… 배운 것도 없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노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었어.”라며 잠시 황 선생은 그때를 회상한다.

용인시 성화 봉송 첫 주자로 소감은 어땠는지 취재진의 첫 질문에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성화 봉송 용인시 첫 번째 주자라니 꿈에도 못 꿀 일이지… 배운 것도 없고 시골에서 농사짓는 노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었어.”라며 잠시 황 선생은 그때를 회상한다.

성화 봉송 때 ‘용인시민 사랑합니다’고 외치면서 달린 이유를 다시 묻자 그는 “용인시에서 너무 많은 배려를 해 준 것은 아닌지 오히려 내가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 그것은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그동안 내가 해 온 것이 많아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이런 역사적인 순간을 맞아 용인시 첫 주자로 참여하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해, 대한민국이 잘 되길 염원했고, 용인시가 잘 되길 염원하면서 ‘용인시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뛰었다”는 황규열 선생.

   
▲ “그때 내 소원이 쌀 한 항아리였다, 쌀 한 항아리만 있으면 내가 배가 안 고플 테니깐”이라며 배고픈 그때 시절을 회상하며 상념에 젖는 황 선생.

그는 백암면 토박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어린 시절 가난과 배고픔으로 어린 동생 둘을 잃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남의 집 담을 넘어 밥을 훔쳐 먹었다. “사흘 굶어서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고, 나는 개. 돼지만도 못했다”며 “그때 내 소원이 쌀 한 항아리였다, 쌀 한 항아리만 있으면 내가 배가 안 고플 테니깐”이라며 배고픈 그때 시절을 회상하며 상념에 젖는 황 선생.

6.25 동란이 끝나고 그는 아버지 덕에 백봉초교를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이듬해 중학교에 겨우 입학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에 새어머니와 아버지가 병석에 들어서 더는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 “어린 나이에 장작을 판돈과 일용직 품삯을 모아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송아지를 키워 팔아 땅 세 마지기를 마련했다.”는 황규열 선생.

이후 가장 아닌 가장이 돼 한 집안을 이끌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장작을 판돈과 일용직 품삯을 모아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다. 송아지를 키워 팔아 땅 세 마지기를 마련했다. 이후 살림이 서서히 피기 시작했다. 23살에 한 살 어린 부인 박이순 씨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1남 3녀를 뒀다.

자식들은 학교가 끝나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이 흘러 스물네 마지기(4천8백 평) 논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인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이 백암면 장학회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돼 있던 차에 그 소리가 마음에 와 닿았다. 아내와 상의 끝에 쌀 열 가마니를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쌀을 기부하는 순간 너무 행복하고 눈물이 났다.”며“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에 나눔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졌다.”는 황규열 선생.

   
▲ 황 선생은 “나에게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이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며 “내가 나 스스로 30년간 쌀 기부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꼭 지키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현재 그의 목표는 직접 농사지은 쌀을 30년 동안 기부하는 것이다. 앞으로 3년 남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황 선생은 “나에게는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이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며 “내가 나 스스로 30년간 쌀 기부를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꼭 지키고 싶다”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에 취재진은 30년을 채우고 난 후에는 또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질문했다.

   
▲ 황 선생은 돌연 취재진에게 질문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며 질문을 한다.<사진 광교저널 최현숙 기자가 황 선생의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황 선생은 돌연 취재진에게 질문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냐?”며 질문을 한다. “또한 가장 서러울 때가 언제냐 ?”고 질문을 한 후 털어 놓는다.

“남들과 나눔했을 때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 가장 서러울 때는 배고플 때다, 나는 배 고픔을 알고 몸으로 겪었다, 아마도 내게 남은 인생 ‘제 버릇 개 못준다’ 내가 농사를 짓는 한 아마도 기부는 계속 될 것이다” 라며 껄껄 웃는다.

황 선생께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신다면?" 취재진의 질문에 “내가 그동안 기부천사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마누라(박이순 씨)가 남편을 믿고 따라 줬기에 덕분에 가능했다”며“1남 3녀를 키우며 같이 흘린 눈물과 흘린 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너무 고맙고 사랑한다.”며 모든 치하를 부인 박이순씨에게 돌리는 황 선생의 모습에서 훈훈하고 애틋한 사랑을 느낄수 있었다.

   
▲ 황 선생은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취재진에게 편지 한 통을 전했다.

황 선생은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취재진에게 편지 한 통을 전했다. 그 편지 속에 그의 인생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하는 황 선생의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의 전문이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규열이 너는 1942년에 태어나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구나.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남의 집 담을 넘어 밥을 훔쳐 먹으며 또한 어린 동생 두 명이나 굶어 죽는 것을 보며 무엇을 배웠느냐.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고 농사일을 시작하며 나무장사 품팔이하여 송아지 한 마리로 살림이 늘었구나. 참으로 장하다. 23살에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어 공부시키며 땅도 사가며 사는 동안 너의 아내를 엄청나게 고생시키며 살았구나.

너는 무엇으로 아내에게 보상하며 살겠느냐. 1991년부터 쌀 10가마니로 장학금을 내기 시작하여 27년간 7,500만 원을 냈으니 공부 못한 설움을 그렇게 달랬구나. 또한, 배가 고파 쌀 한 항아리를 담아 놓고 사는 것이 평생소원이라 생각한 것을 지금까지 쌀 10kg 1,200포대를 불우이웃돕기를 하였으니 네 배고픈 설움이 이렇게 달랬구나. 너는 참으로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구나

네 나이 77살이라며 너는 이렇게 말했지 아프면 병원에 갈 조금의 돈만 있으면 되고 죽으면 장사지낼 돈만 있으면 될 것을, 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할 돈인 것을.

이제 너는 용인시민과 약속한 30년간 나누며 살겠다고 말한 것을 용인시민과 네 이웃을 생각하며 부디 죽을 때까지 멋지게 살 거라. 너는 가난한 농부지만 마음은 용인에서 제일 부자라고 말했지.

77년 동안 참으로 수고 많이 했구나. 남은 생도 잘 살아라.

2018년 1월 1일 아침 황규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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