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7 (목)

  • 구름많음속초22.2℃
  • 구름조금26.2℃
  • 구름많음철원25.5℃
  • 구름많음동두천24.1℃
  • 구름많음파주22.6℃
  • 구름많음대관령17.2℃
  • 구름많음백령도19.9℃
  • 흐림북강릉20.7℃
  • 구름많음강릉22.0℃
  • 흐림동해20.7℃
  • 연무서울24.7℃
  • 구름많음인천23.0℃
  • 구름많음원주25.5℃
  • 안개울릉도20.0℃
  • 박무수원23.7℃
  • 흐림영월22.7℃
  • 흐림충주25.0℃
  • 구름조금서산22.4℃
  • 흐림울진20.2℃
  • 구름많음청주26.8℃
  • 구름조금대전25.5℃
  • 구름조금추풍령22.6℃
  • 구름많음안동24.1℃
  • 구름많음상주24.2℃
  • 흐림포항22.4℃
  • 흐림군산21.6℃
  • 구름많음대구25.2℃
  • 구름많음전주23.0℃
  • 흐림울산23.0℃
  • 구름많음창원23.3℃
  • 흐림광주23.7℃
  • 박무부산21.2℃
  • 구름많음통영21.0℃
  • 박무목포22.2℃
  • 구름많음여수22.9℃
  • 구름많음흑산도21.0℃
  • 구름많음완도22.7℃
  • 구름많음고창22.0℃
  • 구름많음순천23.6℃
  • 박무홍성(예)23.0℃
  • 흐림제주22.3℃
  • 흐림고산21.4℃
  • 구름많음성산21.9℃
  • 구름많음서귀포22.8℃
  • 구름많음진주24.2℃
  • 구름많음강화22.8℃
  • 구름많음양평1.0℃
  • 흐림이천25.7℃
  • 흐림인제23.8℃
  • 구름많음홍천25.1℃
  • 흐림태백19.5℃
  • 흐림정선군22.4℃
  • 흐림제천24.7℃
  • 구름조금보은23.5℃
  • 구름많음천안23.9℃
  • 구름많음보령20.8℃
  • 구름많음부여23.6℃
  • 구름많음금산23.6℃
  • 구름많음부안22.1℃
  • 구름많음임실23.1℃
  • 흐림정읍21.8℃
  • 구름많음남원25.1℃
  • 구름많음장수21.9℃
  • 흐림고창군21.7℃
  • 구름많음영광군22.1℃
  • 구름많음김해시23.3℃
  • 흐림순창군23.8℃
  • 흐림북창원23.4℃
  • 구름많음양산시24.2℃
  • 구름많음보성군24.9℃
  • 구름많음강진군23.2℃
  • 구름많음장흥23.7℃
  • 구름많음해남21.1℃
  • 구름많음고흥22.8℃
  • 구름많음의령군25.6℃
  • 구름많음함양군23.7℃
  • 구름많음광양시24.0℃
  • 구름많음진도군21.1℃
  • 흐림봉화20.6℃
  • 흐림영주22.9℃
  • 구름많음문경23.1℃
  • 흐림청송군20.7℃
  • 구름조금영덕20.2℃
  • 구름많음의성24.5℃
  • 구름많음구미24.2℃
  • 구름많음영천23.1℃
  • 흐림경주시22.5℃
  • 구름많음거창24.0℃
  • 구름많음합천25.3℃
  • 구름많음밀양25.7℃
  • 구름많음산청24.9℃
  • 구름많음거제23.6℃
  • 구름많음남해23.5℃
기상청 제공
미 8군 창설 75주년 기념식 성대히···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회

미 8군 창설 75주년 기념식 성대히···

미 8군 최초 1944년 창설 후···화려한 부대역사
‘상륙 8군(Amphibious Eighth)’이란 별칭에서 한국 공동 방어에 중요한 역할 맡아

DSC_1355.JPG

 

[광교저널 경기.평택/최현숙 기자] 미 8군(중장 마이클 A. 빌스)은 지난 8일 부대창설 75주년을 맞아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기자단을 초청해 국가안보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는 원유철 (자유한국당 평택 갑) 국회의원을 비롯해 내·외빈 및 기자단 포함 500여명 참여했다. 

 

특히 이날 행사에 특전사 고공강하 시범과 3군사령부 의장대의 공연과 각종 군사장비 전시회도 개최하는 한편 행사는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계속되며 행사기간동안 부대내를 외부인들에게 개방했다.  

 

DSC_1352.JPG

국기에 대한 경례하고 있는 미 8군.PNG

 

DSC_1379.JPG

 

DSC_1388.JPG

DSC_1409.JPG

 

KakaoTalk_20190609_025543510.jpg

 

DSC_1401.JPG

 

미 8군은 1944년 6월 10일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공식 창설됐다. 창설 직후남서태평양 지역에 전개된 미 8 군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의 지휘 아래 뉴기니 섬과 뉴브리튼 섬에 잔존하는 적의 최후 저항 세력을 체계적으로 제거했다.

 

지난 1944년 12월 26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미 8군은 태평양 내 최대 규모 연합전장전역인 필리핀을 재탈환하는 데에 적극 개입했다. 미 8군 주도의 5차례에 걸친 ‘빅터(Victor)’ 작전을 통해 국토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필리핀 군도 중남부 지역이 해방됐다.

 

지난 1945년 2월 19일부터 4월 3일까지 미 8군 부대들(중대 규모 팀-사단 급 TF)은 약 14회의 주요 강습상륙작전과 24회의 소규모 상륙작전을 수행했다.

 

44일간 평균 1.5 일 당 1 회의 강습 상륙을 실시한 셈이다. 미 8군은 그 결과 세계 2차 대전 기간 동안 약 60회 이상의 강습상륙작전에 참여한 것을 빗대어 이르는 ‘상륙 8군(Amphibious Eighth)’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필리핀에서 여전히 전투를 진행 중인 동시에, 미 8군은 일본침략을 목표로 한 다운폴작전(Operation Downfall)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1945 년 8 월 15 일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인해 8군 임무가 침략에서 점령임무로 전환되면서 ‘상륙 8군’인 미 8군이 미 육군의 일본 점령을 주도하게 됐다.

 

지난 1945년 12월 31일 미 6 군의 일본 점령 임무가 해제됐고 미8 군이 군축, 비무장화, 민주화에 이르는 과업을 포괄하는 확장된 점령 임무를 맡게됐다. 상기 임무는 미 8군의 작전적 수준에서 완벽히 수행됐고 일본의 군사점령은 일본의 경제 회복과 정치 민주화를 불러왔다.

 

지난 1950 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 8군은 또 다른 주요한 도전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한국전쟁 초기 6주간 지속된 전술적 상황으로 인해 한미 지상군은 병력 절약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는 최상의 상황에서 시행하기에도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기에 한국전쟁 초기 단계에서는 한미 노력의 대부분이 후퇴와 지연 중심으로 이뤄졌다.

 

시간을 벌 수 있는 여력을 소진함에 따라 월튼 워커 중장 (미 8 군 사령관)은 사령부를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시키고 지역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그해 8월 1일 (‘부산 교두보’로 언론이 명명한)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됐다.

 

부산 교두보의 성공적 방어는 한국 전쟁의 향배를 좌우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유엔이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줬다.

 

그해 9월 15일에 시행된 인천 상륙작전과 더불어 부산 교두보 전투가 발생하면서, 결과적으로는 북한 조선인민군 전체가 붕괴됐다.

 

실질적으로 조선인민군은 격퇴됐고 북한군 전력만으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북한에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됐다. 그해 10월 1일 미 8군은 38선에 도달했고 9 일 미 제 1기병사단과 한 제 1사단을 선봉으로 해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19 일 한미 양국의 두 사단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포위했고 11월 24일 미 8 군은 종전 공세를 시작했다.

 

최종 승리가 임박한 듯 보였으나 상황은 예상치 못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11월 25일 중화인민지원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고 (당시 각자개별적으로 작전 수행중이던) 미 8군과 10군단은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기습과 수적인우세로 중공군은 수차례에 걸쳐 통합 공격을 실시해 북한에서 우군을 격퇴하고, 지난 1951년 1월 4일 6개월 만에 서울의 주인이 세번째로 바뀌게 된다.

 

미 8군은 효과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275 마일을 철수했다. (이는 미군 역사상 최장거리를 철수한 것입니다.) 이후, 한국 내 중공군이 수백만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며 한반도 철수와 관련된 루머가 만연했다.

 

그해 1 월 중순 미 8군(매튜 리지웨이 장군 지휘)은 제한된 표적을 대상으로 하는 공격에서 연이어 크게 성공했다.

 

측면 경계에 중점을 둔 이들 작전은 지역이 아닌 전력에 중심을 두고 진행됐다. 지역 점령은 교전 및 적군 격멸로 이어졌다. 그해 3월 15일 서울은 네번째로 탈환됐다.

 

전쟁 중 마지막 수복이 됐다. 3월 말 미 8군은 38선에 도달했으며 3주 후 20마일 앞에(주 저항선 앞 대부분 지역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해 봄 양측 모두 전투의 범위나 규모가 확대되기를 원하지 않고, 일방의군사적 승리가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국공산당은 서울 탈환을 위한 최후의 대규모 공세를 결심했다. 일단 서울 탈환한 후 휴전을 지지하려고 했다. 남측의 수도를 확보하면 정전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었다. 중공군 제 5차 공세(그해 4 월 22 일 – 7 월8 일)는 한국전쟁당시 최대 규모의 지상 작전이었다.

 

두 단계 전역 간 중화인민지원군은 주요목표 달성에 참담하게 실패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해 여름이 되자 지상전은 지연전으로 전환됐다.

 

이에 따라 양측이 협상을 개시해 고착된 군사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해 보였다.

 

한국전쟁 휴전회담은 그해 7월 10일에 개시돼 복잡하고 장황하고 짜증스러운 논의 끝에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체결됐고 이로써 한반도 내 전면전은 공식 중단됐다.

 

휴전이 되자 미 8군은 전,후 복구를 위해 한국을 지원했으며 지속적으로 한국 공동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맡아 왔다.

 

오늘날에도 북한이 한반도 무력 통일 의지를 굽혔다고 볼 수는 없다. 임무 달성 강화 및 지속을 위해 미 8 군은 창설 이후 전투 편성을 수차례 개편했다.

 

2차 대전 당시 미 8군은 야전군으로서 태평양 작전전구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2차 대전 직후 미 8군은 일본에서 점령군으로 작전을 실행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 8군은 야전군 및 전구육군 역할을 수행했고 냉전 기간 동안 주로 전구 육군의 역할을 맡았다.

 

지난 1954년 11월 20일 미 8군은 역내 주요 육군사령부로서 미국극동육군에 통합됐다. 지난 1957년 7월 1일 미국극동육군은 주한미군으로 대체됐다.

 

이에 따라 미 8군은 주한미군 및 서울에 본부를둔 유엔군 사령부로 통합됐다. 세개 사령부 본부는 조지 데커 장군이 지휘했다.

 

지난 1978년 11월 7일 존 베시 장군이 유엔사령부 및 주한미군,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함과 동시에 새로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를 지휘하게 됐다.

 

지난 1992년 12월 1일 미 8군은 3성 장군조직으로 복귀하고 유엔사/주한미군사/연합사와 분리됐다.

 

지난 1998년 3월 13일 미 8 군은 주한미군 육군구성군사령부로 지정됐다가 지난 2012년 1월 23일 작전급 야전군 본부로 재지정 됐다.

 

미 8군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미 8군 사령부는 조만간 본부를 캠프 험프리스로 이전하는 다른 주요변혁의 최종단계를 거치고 있다. ”며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체계가 확보돼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영속적인 평화가 보장 될 때 까지 미 8군 임무는 변함없다.고 전했다.

 

또한 ”한국에 대한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고 적대 행위를 방지한다.“며”억제 실패시, 한국에 대한 외부 위협을 격퇴한다.고 덧붙였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